(no)thing

“결국 드러내려 할수록 덜어내게 되고, 반대로 들어낼수록 더 많은 것이 드러나는 것, 나는 그 역설에 관심이 있다.”—이명호, 2026
갤러리현대는 2026년 10월 29일부터 12월 20일까지 이명호의 개인전 《(no)thing》을 개최한다. 이명호는 지난 20여 년간 사진 매체를 중심으로 사진과 회화의 경계, 재현과 재연, 존재와 부재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2018년 《이명호: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이후 8년 만에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새로운 연작을 통해 작가의 작업 세계가 역사적·사회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지점을 조명한다. 기후변화로 삶의 터전이 위협받고 있는 태평양의 섬나라 키리바시를 기록한 〈키리바시(Kiribati)〉(2026)와 덕수궁 선원전 터에서 수백 년간 자리를 지켜온 회화나무를 담은 〈헤리티지(Heritage)〉(2024–2026) 연작을 중심으로 근작 30여 점을 선보인다. 출품작은 사진 작업을 비롯해 이미지 속 형상을 칼로 섬세하게 들어낸 작업과 대형 캔버스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된다.
이명호는 사진을 단순히 대상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매체로 한정하지 않고, 작가의 개입과 일련의 행위까지 작업의 영역으로 확장해 왔다. 2004년부터 전개해 온 그의 ‘사진-행위 프로젝트(Photography-Act Project)’는 주체와 객체, 재현과 재연, 보는 것과 보이는 것, 그리고 그 너머와 사이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작업이다. 작가는 특정 장소에 거대한 흰색 캔버스를 설치해 풍경에 개입하고, 그 장면을 다시 사진으로 기록한다. 나무 뒤에 설치된 캔버스는 주변 풍경의 일부였던 나무를 독립된 대상으로 부각한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드러내는 ‘재현(再現, Re-Presence)’인 동시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던 장면을 만들어내는 ‘재연(再演, Re-Produce)’의 행위이기도 하다. 자연 풍경 속에 캔버스를 설치한 작품에서는 캔버스가 낯선 요소로 등장하며 현실과 비현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처럼 이명호의 작업에서 재현과 재연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교차하며, 이미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드러내는 동시에 현실에 없던 장면을 생성한다. 이러한 개입은 사진과 회화, 실재와 이미지의 경계에 질문을 던지고,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가려지는지,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존재와 부재,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촬영된 이미지에 조소적 개입을 가해 대상의 형상을 칼로 섬세하게 들어낸 작업 역시 재현과 재연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다. 형상을 제거하는 행위가 오히려 그 대상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환기한다는 점에서, “들어낼수록 더 많은 것이 드러나는” 역설을 보여준다.
전시 제목 《(no)thing》은 이러한 존재와 부재의 관계를 함축한다. 괄호 안의 ‘no’를 포함하면 ‘nothing(없음)’이 되고, 이를 제외하면 ‘thing(있음)’이 된다. 제목은 있음과 없음을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구분하기보다, 존재하는 것을 통해 부재를 인식하고, 부재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관계를 암시한다.
〈키리바시(Kiribati)〉와 〈헤리티지(Heritage)〉는 서로 다른 방향의 시간을 포괄한다. 〈키리바시(Kiribati)〉가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풍경을 통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상실을 환기한다면, 〈헤리티지(Heritage)〉는 덕수궁 선원전 터에 남아 있는 회화나무를 통해 사라진 건축물과 축적된 역사의 시간을 되짚는다. 이처럼 두 연작은 현재 존재하는 것을 통해 미래의 부재를 예감하게 하고, 과거의 부재를 통해 현재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며, 존재와 부재가 서로 맞물려 있는 관계임을 드러낸다. 나아가 우리가 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것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지 되묻게 하며, 우리 자신을 비롯한 존재들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진다.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1층 전시장은 현재의 풍경과 공동체의 삶에 드리운 미래의 상실 가능성을 다루는 〈키리바시〉 연작으로 시작한다. 적도와 날짜변경선 부근에 있는 태평양의 섬나라 키리바시는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위협받고 있는 곳이다. 이명호는 이곳의 바다와 맹그로브 나무, 주민들의 일상을 기록하며, 향후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이 키리바시의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이어져 온 공동체의 삶과 기억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Kiribati #1_1_1〉과 〈Kiribati #1_1_2〉에는 현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쓰러진 나무에 야자 섬유를 성글게 엮어 만든 반투명한 구조물이 등장한다. 구조물 사이로 뒤편의 바다와 맹그로브 나무가 부분적으로 비쳐 보이는 장면은 풍경을 온전히 드러내지도, 완전히 가리지도 않는다. 이처럼 존재하는 풍경을 부분적으로 가리고 드러내는 방식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이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환기하며, 키리바시가 마주한 미래의 상실을 현재의 풍경 속에서 생각하게 한다.
이어지는 지하층 전시장에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풍경을 사진 속에서 지워냄으로써, 미래의 부재를 현재의 시점으로 불러온다. 〈Kiribati #1_2〉와 〈Kiribati #3_3〉은 인화된 사진 속 맹그로브 나무와 수평선의 형상을 수술용 메스와 건축용 나이프로 직접 긁어낸 작품이다.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물리적인 흔적이 남아, 오히려 그 자리에 무엇이 존재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한편, 작은 돌섬 위에 캔버스를 세워 땅의 존재를 부각한 〈Kiribati #2_1〉과 그 돌섬의 형상을 직접 긁어낸 〈Kiribati #2_2〉는 동일한 풍경에서 대상이 드러난 이미지와 제거된 이미지를 나란히 제시한다. 이처럼 캔버스를 통해 대상을 드러내고, 사진 속 형상을 들어냄으로써 다시금 존재를 환기하는 과정은 이명호가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존재와 부재의 관계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러한 작업 방식은 키리바시가 처한 현실과 맞닿으며, 지금 존재하는 풍경에 미래의 부재 가능성을 겹쳐 보이게 한다.
이명호는 시간을 켜켜이 쌓아가는 장노출 촬영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형상과 사진에 남겨진 시간의 흔적을 탐구한다. 〈Work View; Kiribati #1_1_1_2〉는 물리적인 캔버스를 설치하는 대신 키리바시의 바다 자체를 하나의 캔버스로 삼아 촬영한 작업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파도가 하나의 화면에 중첩되면서 물결의 구체적인 형상은 희미해지고, 바다는 매끈하고 평평한 색면처럼 나타난다. 실재하는 바다를 기록한 사진이 마치 회화와 같은 화면으로 나타나는 가운데, 개별 파도의 형상은 사라지지만 그 움직임이 지속된 시간은 이미지에 남는다.
키리바시에서 풍경을 가리면서 동시에 드러내는 이명호의 작업 방식은 전시 공간의 구성으로도 이어진다. 〈Nothing But #7_1〉, 〈Nothing But #7_2〉, 〈Kiribati #3_1〉이 전시되는 좁고 긴 통로에는 검은 실로 이루어진 장막이 설치된다. 장막 사이로 작품과 그 너머의 공간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키리바시에서 반투명한 구조물을 통해 바다와 맹그로브 나무를 가리면서도 드러냈던 작업 방식을 전시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다.
2층에서는 〈헤리티지(Heritage)〉를 만나볼 수 있다. 〈헤리티지(Heritage)〉 연작은 덕수궁 선원전 터에 남아 있는 회화나무를 통해 현재의 풍경에 겹쳐 있는 과거의 역사를 되짚는다. 역대 왕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 터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를 거치며 여러 변화를 겪었다. 이명호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약 250년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회화나무에 주목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회화나무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나무의 형상이 온전히 드러난 사진과 이를 직접 긁어낸 사진을 함께 제시하여 동일한 대상의 존재와 부재를 대비시킨다. 〈Heritage...... #7_1〉은 회화나무를 수직으로 내려다본 이미지를 아홉 개의 캔버스에 펼쳐 보이는 대형 작업이다. 이명호는 수평적 시선을 민중과 현재에, 수직적 시선을 왕과 과거에 대응시키며, 서로 다른 시점의 교차를 통해 현존하는 나무와 그 자리에 축적된 역사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이처럼 나무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 형상을 지워내는 시도는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Tree〉 신작으로도 이어진다. 이명호가 그동안 흰 캔버스를 통해 나무의 존재를 부각해 왔다면, 〈Tree #8_2〉, 〈Tree #15_2〉, 〈Tree #17_2〉, 〈Tree #20〉에서는 사진 속 나무의 형상을 직접 긁어내는 방식을 새롭게 시도한다. 이 작품들의 프레임은 소목장 유진경과의 협업으로 제작되었다. 사진 속에서는 나무의 형상이 사라졌지만, 이를 둘러싼 목재 프레임에서는 나무가 작품을 구성하는 실제 물질로 존재한다. 이처럼 사진 속에 부재하는 형상으로서의 나무와 작품을 이루는 물질로서의 나무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명호는 나무라는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명호의 작업은 새로운 촬영 기법이나 제작 방식을 선보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진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라는 오랜 질문이 키리바시에서는 현재 이어지는 공동체의 삶과 미래의 상실 가능성으로, 덕수궁 선원전 터에서는 남아 있는 회화나무와 더 이상 볼 수 없는 과거의 풍경으로 향한다. 《(no)thing》은 이처럼 사진을 통해 현재의 삶과 그 안에 겹쳐 있는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편, 같은 시기 사비나미술관에서도 이명호의 개인전 《장막과 장면 사이 혹은 너머》가 개최된다. 2004년부터 이어져 온 ‘사진-행위 프로젝트’의 생성과 변화, 확장 과정을 살펴보는 작업 연구전으로,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주요 연작을 통해 이명호가 발전시켜 온 질문과 방법론을 조명한다. 전시는 12월 13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