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예술입니까? — 다다가 세상을 향해 던진 유쾌한 폭탄
미술관 한가운데 남성용 소변기가 놓여 있습니다. 조각가가 정성껏 깎아 만든 것도 아닙니다. 공장에서 생산된 기성품을 가져와 방향을 바꾸고 서명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미술이라니요. “도대체 장난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사실 꽤 정확하게 작품의 핵심에 도착하신 겁니다. **다다(Dada)는 바로 그런 질문을 일으키기 위해 등장한 운동이었으니까요.**
다다는 20세기 초, 정확히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위스에는 전쟁을 피해 온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해 2월, 독일의 작가 **후고 발(Hugo Ball)**과 예술가이자 공연자였던 **에미 헤닝스(Emmy Hennings)**가 취리히 슈피겔가세에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라는 작은 예술 공간을 열었습니다. 트리스탄 차라, 한스 아르프, 마르셀 얀코, 리하르트 휠젠베크 등이 이곳에 모였고, 시와 음악, 춤, 낭독과 기괴한 퍼포먼스가 뒤섞인 새로운 실험을 벌였습니다. 카바레 볼테르는 오늘날 스스로를 ‘다다의 탄생지’라고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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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들은 그렇게 엉뚱한 예술을 시작했을까요?
그들의 눈앞에서는 유럽 전체가 전쟁으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합리성과 진보를 자랑했던 현대 문명이 기관총과 참호전, 대량 살상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기존 사회의 가치와 이성에 대한 신뢰 자체가 흔들렸습니다. 다다는 이런 시대를 향해 점잖은 그림 한 점을 내놓는 대신, **“그렇게 합리적인 세상이 만들어낸 결과가 이것이라면, 우리에게 그 합리성이 왜 필요한가?”**라고 되묻는 듯했습니다. 실제로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다다를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새롭게 등장한 기계·미디어 문화에 대응해 생겨난, 하나의 양식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전위예술 운동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다다의 작품에는 통일된 화풍이 없습니다. 어떤 작가는 신문과 잡지를 잘라 **콜라주와 포토몽타주**를 만들었고, 어떤 이는 우연에 따라 종잇조각을 떨어뜨려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절을 외치는 ‘음향시(sound poetry)’도 등장했고, 춤과 가면, 즉흥 공연까지 예술이 되었습니다. 추상, 우연, 콜라주, 포토몽타주, 레디메이드, 퍼포먼스와 미디어를 이용한 장난까지—다다는 예술의 재료와 방법을 사방으로 폭발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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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지점에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을 만나게 됩니다. 다다와 연관된 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1917년의 **〈샘(Fountain)〉**입니다. 뒤샹은 공장에서 생산된 남성용 소변기를 선택해 ‘R. Mutt’라는 이름을 적고 작품으로 제시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소변기를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었느냐가 아닙니다. 그는 애초에 만들지 않았습니다. **선택했습니다.**
이런 작업을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부릅니다. 평범한 기성품을 선택해 원래의 용도와 맥락에서 떼어내고 예술로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에서 미술사의 오래된 기준 하나가 크게 흔들립니다. 예술가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능숙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예술의 가치는 솜씨에 있는가, 아니면 선택과 생각에도 있을 수 있는가? 작품이라고 선언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다다가 던진 질문은 오늘날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다다’라는 이름 자체도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명칭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전해지므로 하나의 이야기만을 확정적인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특정 언어와 고정된 의미에 붙잡히지 않는 ‘다다’라는 말의 모호함 자체가 이 운동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카바레 볼테르 역시 다다를 예술과 비예술, 계획과 우연,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 운동으로 설명합니다.
다다는 취리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하노버, 쾰른, 뉴욕, 파리 등 여러 도시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베를린에서는 신문과 잡지의 사진을 잘라 재조합하는 포토몽타주가 날카로운 정치·사회 비판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반면 뉴욕에서는 뒤샹과 프랜시스 피카비아, 만 레이 등의 실험을 통해 기계와 기성품, 예술가의 아이디어 자체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다다는 하나의 본부에서 같은 양식을 반복한 운동이 아니라, 도시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흔든 국제적 전위운동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다이스트들은 정말 예술을 싫어했던 걸까요?
그들은 기존의 예술 제도와 권위, 고상함의 기준을 공격했고 때로는 ‘반예술’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술을 공격함으로써 예술의 영역을 엄청나게 넓혀놓았습니다.** 그림과 조각만이 작품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일상의 물건, 우연한 행동, 사진 조각, 인쇄물, 언어와 공연까지 예술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버린 것입니다. 그 영향은 이후 초현실주의를 비롯해 개념미술과 퍼포먼스 등 20세기 현대미술의 여러 흐름에서 이어집니다. MoMA 역시 다다의 실험이 이후 미술에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다다 작품 앞에서는 “이게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대신 이렇게 물어보세요.
**“왜 이것을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을까?”
“누가 이것을 예술이라고 결정하는가?”
“내가 작품이라고 믿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순간 조금 전까지 황당하게 보였던 소변기와 찢어진 신문지, 의미 없는 소리가 갑자기 만만치 않은 존재로 변합니다.
다다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을 감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준 운동이라기보다, **예술이라고 믿어온 것들을 의심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운동**이었습니다. 전쟁으로 기존 질서가 무너진 시대에 등장해 예술의 규칙까지 뒤집어버렸던 다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 미술관에서 여전히 “이것도 예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어쩌면 다다의 장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