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나’를 바라보다 — 제임스 터렐

미술관에 들어섰는데 벽에 걸린 그림도, 바닥에 놓인 조각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대신 어둑한 공간 저편에 푸른빛이나 붉은빛이 떠 있습니다. 분명 평평한 벽인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처럼 느껴지고,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빛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체를 잃어버립니다.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작품 앞에서는 우리가 평소 너무도 당연하게 믿어왔던 ‘본다는 것’부터 의심하게 됩니다.
194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터렐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1960년대 중반 등장한 ‘빛과 공간(Light and Space)’ 운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조금 뜻밖입니다. 포모나 칼리지에서 그가 집중적으로 공부한 것은 심리학과 수학이었습니다. 특히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훗날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이후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image:https://www.guggenheim.org/wp-content/uploads/1967/01/92.4175_ph_web-1.jpg|Afrum I (White), 1967]]
터렐에게 빛은 그림을 잘 보이게 해주는 조명이 아닙니다. **빛 자체가 작품의 재료**입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어두운 공간에 빛을 투사하며 벽과 모서리, 공간의 깊이가 실제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967년의 초기작 《Afrum I (White)》에서는 방의 모서리에 빛을 투사해 마치 하얀 입방체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시를 만들어냅니다. 가까이 가보면 그곳에는 단단한 물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물체’라고 믿었던 것은 빛과 우리의 눈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었지요. 터렐의 유명한 표현인 **‘내가 보고 있는 나를 보는 것(seeing yourself seeing)’**은 바로 이런 경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그의 작품 앞에서는 “무엇을 그린 것인가?”라고 묻기보다 “지금 내 눈은 무엇을 보고 있다고 믿는가?”라고 물어보는 편이 좋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빛인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람자의 지각이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던 사람이 어느새 자신의 감각을 관찰하는 사람이 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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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각을 건축적 공간으로 확장한 대표적인 작업이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입니다. 천장에 정교하게 뚫린 개구부를 통해 하늘을 바라보도록 만든 공간이지요. 하늘은 늘 우리 머리 위에 있지만, 사각형이나 원형의 틀 안에 들어오는 순간 놀랍게도 한 장의 색면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는 자연광과 인공조명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실제 하늘의 색조차 비현실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터렐은 세계 여러 지역에 이러한 스카이스페이스를 만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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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든 실험이 거대한 규모로 집약된 곳이 미국 애리조나주의 **《로덴 크레이터(Roden Crater)》**입니다. 플래그스태프 인근의 사화산을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자 맨눈으로 천체를 관찰하는 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입니다. 터렐은 1970년대부터 이곳에 방과 터널, 하늘을 향한 개구부를 만들며 수십 년에 걸쳐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미술관 안에 작품을 들여놓는 것을 넘어, 화산과 하늘과 태양과 달, 그리고 관람자의 눈까지 하나의 작품 안에 끌어들인 셈입니다. 현재도 완성을 향해 진행 중인 그의 평생 프로젝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터렐이 젊은 시절부터 비행기를 조종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빛과 대기, 수평선에 대한 경험은 그의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땅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지고 빛이 마치 물질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미술과 건축, 심리학과 천문학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흐려집니다.
[[image: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hK7Ydy3O8wwKgeGMsre5Vcs3VLr_Dili7JvzK9and4U7UiW7hyphenhyphenJIb5XrsdjFkiay0JEWnBQ38pallGtOHjPEwzf1Mn_HoZ5EzzsbXNT4nN4IwnfinVdPph6T_a06NbrEA7jp1A0hDtEk1T/s1600/NOAA_AtenReign_JamesTurrell_GuggenheimNewYork.jpg|Aten Region: James Turrell's New Space at the Guggenheim New York]]
2013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원형 로툰다 전체를 빛으로 변화시킨 《Aten Reign》 역시 이러한 세계관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관람객들은 위를 바라보며 서서히 변하는 빛과 색 속에 머물렀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빛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같은 해 터렐은 미국 예술계의 최고 영예 가운데 하나인 **National Medal of Arts**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보고 나오면 이상하게도 평범한 하늘이 전과 조금 다르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 해 질 무렵 푸른 하늘의 농도, 벽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햇빛에도 잠시 눈길이 머뭅니다. 어쩌면 그것이 터렐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중요한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대신, 우리가 이미 매일 보고 있었지만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빛을 보는 법’**을 되돌려주는 것.
그의 작품 앞에서 꼭 무언가를 이해하려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잠시 서서 빛을 바라보세요. 그러다 어느 순간, 빛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보고 있는 자신의 눈을 의식하게 된다면**, 이미 제임스 터렐의 작품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