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하나가 얼굴을 가렸을 뿐인데 — 마그리트가 우리에게 보지 못하게 한 것

사과 하나가 얼굴을 가렸을 뿐인데 — 마그리트가 우리에게 보지 못하게 한 것

그림 속 남자는 너무나 단정합니다. 검은 중절모, 짙은 외투, 붉은 넥타이. 낮은 돌담 뒤에는 잔잔한 바다가 펼쳐지고, 흐린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신사의 초상처럼 보이는데, 결정적으로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의 얼굴 한가운데에 초록 사과가 떠 있습니다.** 사과를 치워버리고 싶어집니다. 저 뒤에는 어떤 얼굴이 있을까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르네 마그리트가 만들어놓은 함정에 들어갑니다.

1964년 제작된 **〈The Son of Man〉(Le fils de l'homme, 인간의 아들)**은 벨기에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가장 유명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졌으며, 화면 속 중절모를 쓴 남자는 마그리트 자신과 연결됩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미국의 변호사 해리 토르치너(Harry Torczyner)가 작가의 자화상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마그리트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문제를 고민했고, 결국 얼굴을 사과로 가리는 뜻밖의 방식으로 자화상에 답했습니다. 작품은 완성된 1964년 토르치너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사과 가장자리 너머로 남자의 눈 일부가 슬쩍 보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한 얼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마그리트가 평생 즐겨 다룬 문제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고 해서 정말 그것을 알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했습니다. 파이프를 정교하게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던 〈이미지의 배반〉처럼, 마그리트에게 그림은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창문이 아니었습니다. 익숙한 사물들을 엉뚱하게 결합하고, 너무나 평범한 장면에 작은 균열 하나를 만들어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현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장치였습니다. MoMA 역시 구름, 파이프, 중절모, 초록 사과 같은 일상적인 사물들을 낯선 상황에 놓음으로써 마그리트가 재현과 현실의 관계에 질문을 던졌다고 설명합니다. 〈The Son of Man〉에서 그 역할을 맡은 것이 사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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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아주 평범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초현실적인 괴물도, 기괴하게 변형된 물체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필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얼굴 앞**에 놓이는 순간, 평범한 사과는 갑자기 불편한 장애물이 됩니다. 마그리트는 이 작품과 관련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고 있으며, 인간은 가려진 것을 보고 싶어 한다는 취지로 설명했습니다. 보이는 것과 그것이 감추고 있는 것 사이의 긴장 자체가 그의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절모를 쓴 남자는 누구일까요?

중절모 신사는 마그리트 작품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때로는 여러 명으로 증식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오고, 때로는 뒷모습만 보여주며 풍경을 바라봅니다. 특히 1950년대 이후 이 인물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발전했습니다. 마그리트 자신도 중절모를 즐겨 썼습니다. 그는 중절모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모자이며, 자신 역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마그리트이면서 동시에 어느 누구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얼굴은 사라지고 ‘평범한 신사’라는 외형만 남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얼굴이 가려지자 우리는 그 사람을 더 궁금해합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강하게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묘미입니다.

제목 **‘The Son of Man’**도 수수께끼를 더합니다. ‘인간의 아들’은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표현이지만, 마그리트는 이 제목에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작품 제목은 마그리트와 그의 친구 루이 스퀴트네르가 고민하던 중 스퀴트네르의 아내 이렌이 제안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니 사과를 성서의 선악과로 단정하고 그림 전체를 종교적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그림 앞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남자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사과를 바라보면 얼굴이 궁금하고, 얼굴을 보려고 하면 사과가 시선을 막습니다. 결국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을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남자의 정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보고 싶어 하는 욕망’**입니다.

마그리트는 기괴한 환상을 그려 현실에서 도망친 화가라기보다, 너무나 익숙한 현실을 조금 비틀어 우리가 그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만든 화가였습니다. 〈The Son of Man〉에서도 필요한 것은 사과 하나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그림이 6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이유도 그것인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미지보다, **딱 하나를 끝내 보여주지 않는 이미지가 훨씬 오래 마음에 남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