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 미확정 지도 The Age of Exploration: Uncharted Maps

□ 전시명: 대항해 시대, 미확정 지도 The Age of Exploration: Uncharted Maps
□ 전시기간: 2026년 8월 25일(화) ~ 11월 22일(일) / 90일간
□ 전시장소: 모란미술관 별관, 본관 실내전시장, 백련사영역(대웅전, 산신각, 요사채)
□ 참여작가: 강강훈, 김서울, 김아라, 김지민, 김철환, 김형주, 노해율, 류은미, 민성홍, 민정See, 박경묵, 박성훈, 박소현, 박예림, 박종욱, 박혜원, 서예지, 신승민, 정직성, 지심세연, 최혜숙, 허현숙(총22명)
□ 작품 수 : 99점
□ 장르: 회화, 조각, 설치, 드로잉, 영상 등
□ 주최/주관: 모란미술관
□ 기획: 조은정(미술평론가,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지원센터(2026 전속작가 공사립미술관 전시 개최 지원 사업)
대항해 시대, 미확정 지도
조은정(미술평론가,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번화한 도시, 기술이 지배하는 지금의 세계는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소산이다. 1453년, 유럽의 정치, 종교의 거점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제국이 점령하였다. 유럽은 대륙 간의 다른 국가들과 교역로가 막히게 되자 바닷길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16세기 들어 인류는 자연스레 대륙에서 대양으로 향했다. 신대륙 발견, 식민지 확장, 산업혁명과 같은 변화의 주도권은 바다에 배를 띄운 국가들에게 돌아갔다. 땅에서 통하던 생존방식은 물론이려니와 전투방식마저도 항해에서는 달랐다. 다름에 적응한 이들이 주도권을 가져갔다는 말이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 다름을 바탕으로 건설된 세계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견고한 벽을 둘러친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 부끄러운 역사, 잘못 들어선 길이라고 일컬을 만한 것들을 손꼽다 보면 그 모두가 이해, 관용, 관대함을 저버린 데서 시작한 것들이다.
현대사회의 특성은 대항해 시대의 소산으로서 생성된 도시, 경제구조, 사회제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점도 있다. 공업의 생산성을 기반으로 살아가던 산업혁명 이후의 인류는 3차 산업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무형의 생산성을 기반으로 하는 삶으로 진입하였다. 모든 거주자들이 물질과 자원이 집약된 도시에 거주하는 확률이 더욱 높아질 것이며 사물을 디지털로 연계하는 가상의 경험세계에 살아갈 것이라 예견되었다. 천천히 그려지던 그 세계는 갑작스레 속도를 내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경제와 사회 전반에 융합되어 나타나는 차세대 혁신인 4차 산업을 지나 데이터의 세계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 DX를 거쳐 AX의 시대에 들어선 아주 짧은 시간 속에서 우리 삶의 방식과 세계 구성을 향한 새로운 항해의 길이 열리고 좌표가 그려지는 것을 보고 있다.
클라우드 서버와 데이터베이스가 기반인 DX의 시대, 이른바 클라우드 세계로 명명되던 시간에서부터 AX의 시대인 자율화의 시대이다. 지도와 같은 DX를 기반으로 모든 면에서 자율주행차와 같은 도구를 얻게 된 지금, 공정성(fairness), 투명성(transparency), 책임성(accountability)과 같은 원칙을 사유와 도구 사용의 원칙에 두어야 할 때임이 강조된다. 지금 우리 시대는 보다 윤리적이어야 하며, 타문화를 이해하고, 문맥적 맥락을 파악하여야 하며 데이터와 데이터 간, 사람과 사람 간 협업 또한 요구된다. 초연결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상의 생활을 자율적으로 구성하고 조정할 수 있는 세계에 도착하여 있기 때문이다.
기계와 기술을 넘는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서 인류는 21세기에 새로운 대항해 시대를 맞았음을 인지한다. 더불어 데이터와 경험을 기반으로 한 많은 직업군이 기능을 위협받는 AI시대에 예술은 지속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 속에서 창조성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소환한다. 인간 고유의 것이라 여겨지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AI의 결과물에서 점점 발견되는 횟수가 증가하는 때에 개인의 ‘창조적 사고’에 기반한 창조성의 정의만으로는 예술을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창의성이란 개인의 심리적 능력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개인·영역·사회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체계라고 하였다. 문화적 맥락 안에서 독창성을 가진 주체로서의 인간이 만든 새로운 결과물이 그 영역에 속하는지, 그리고 창의적인지 평가하고 판정하는 전문가 집단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사회 안에서 창조한 작품이 전문가 집단에 의해 인정받아야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미술의 시스템에 대한 정의와 닮아있다. 결국 인간 고유의 특성을 지닌 창조성이란 사회 안에서라는 배경을 전제로 하기에 진공상태의 AI가 만들어내는 것과는 차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전속작가제’를 전제로 한 것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함께하는 갤러리의 전속작가들 가운데 22명을 초대하였다. 사회 인정시스템이 가동된 예술가들로서 시스템 안에 있는 이들은 역으로 해석하자면 우리 사회의 지금, 개인의 창조성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은 새롭게 열린 데이터의 시대에 인간의 지능과 노동력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장을 열어젖히는, 항해하는 이들과 같다. 망망대해에 배를 띄웠던 16세기의 사람들처럼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새로운 기술과 도구 그리고 끊임없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해가는 AI의 기세를 뚫고 인간이 ‘해오던’ 예술의 본질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이다. 이들은 진공상태와 같은 예술이라는 우주에 함선을 띄운 이들로서 그들의 항해는 인류 지성과 감성, 역사가 될 것이다. 언젠가는 항해하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는 하늘의 별자리처럼, 좌표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들 작가군을 공간의 특성과 개념을 조합하여 3개의 장으로 구분하였다.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가는 우리 시대의 여정을 의미하는 《대항해 시대, 미확정 지도》라는 전시명 아래 1부 경계, 2부 접속, 3부 조우로 구성하였다. 대항해 시대의 좌표를 향한 항해를 떠나는, 경계를 넘는 작품을 배치한 <경계>에서 시작하여 외부와 내부, 시간과 공간, 개념과 현상이 공존하는 작품들이 전시된 <접속>, 전통과 현대성의 공존, 생명의 질서와 구조를 드러내는 데 주력하는 작품들을 배치한 <조우>가 전시 내용이다. 전시 전체는 모란미술관의 공간 구조를 기반으로 전시 공간 가장 전면에 위치한 건물로부터 담장 안 미술관 본관 그리고 미술관 영역 뒤쪽의 한옥과 자연경관으로 구성된 한옥 전시장으로 이어진다. 바깥에서 안으로, 인공에서 자연으로, 일상에서 휴식으로, 관념에서 자유로 향하는 관람의 항해를 조성하였다.
자동차 오가는 길가에서부터 오솔길을 지나 연못을 끼고 돌아 조용한 숲속으로 이끄는 공간에서 작품을 만나는 작품 경험은 초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앞과 위로만 향하는 인간의 욕망과 잠시 거리를 두게 하고 개인적 삶을 반추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항해가 보람차게 하는 데에 이르게 할 것이다.
드러내기의 법칙, 경계
비움, 가림, 중첩 등의 전략은 감각적 긴장을 높이고 의미를 전환하는 출발점이 된다. 경험을 통해 판단하는 기존의 인식 체계가 일시적으로 유보되고 새로운 사유나 인지적 전환이 일어날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억압된 것들은 임계점(경계)을 통해 드러난다. 미술에서 경계란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가져오는 행위이자 기존 세계를 흔들어 진동시키는 지점이다. 강강훈, 민성홍, 김철환, 박종욱은 고운 인물이 의외로 상처를 입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던가 버려지거나 더럽다고 여긴 것들을 작품의 재료로 삼거나 순간의 행동이나 하찮은 미물로 여겨지는 것을 기념비화함으로써 경계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강강훈이 그려내는 인물은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은 그 너머의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생동감 넘치는 현실의 것을 넘어선 회화임을 사진처럼 묘사한 화면 위에 물감이 흩뿌려진 얼룩을 통해 드러낸다. 또는 그럴 것이라고 여겨지는 인물에 의외의 상황을 연출하여 얼룩을 만들어낸다. 그 얼룩이야 말로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지적한 ‘일상적 인식을 깨뜨리고 사유나 역사 속에 깊이 침투하는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흔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상적 충격은 머물지 않고 얼룩처럼 번져가는 것, 역사의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된 파편·잔해들이 남기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 바로 얼룩이다. 강강훈의 세밀히 묘사된 사물과 대조되는 얼룩은 우리의 욕망에 의해 지나친 것들에 대한 비유이자 억압하는 것들의 드러내기이다.
민성홍은 인간이 사용하던 물건을 재가공하여 감각을 부여하여 기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기록한다. 그 기록은 때론 무감한 인간에 대한 비판으로도 보이는데 그가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도시 개발과 이주 과정에서 버려진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쓰임을 다한 물건들은 버려지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수집하여 여전히 용도로서는 전혀 쓸모없지만 다른 차원에서 가치가 높은 미술작품으로 되살림으로써 사물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형태는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탄생하지만 사용된 물질 자체가 가지는 시간과 기능에 대한 회고는 작품을 서사화한다. 버려진 시간을 드러내는 동시에 현대사회의 부동산이라는 견고한 욕망을 너무나 일시적이고 스케치처럼 나약한 드로잉 방식으로 공간에 드러냄으로써 욕망의 연약함을 은유한다.
김철환이 사용하는 재료는 인간 사회에서 버려지는 것들, 감추어져야 하는 것들로 규정되는 지저분하고 금기시되는 것들이다. 신체의 모발이나 살갗과 같이 생생한 것의 일부였으나 그곳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순간 그것은 더러워서 버려지고 숨겨져야 할 것들이 되고 만다. 작가는 이것을 수집하여 고풍스런 장식장에 진열하거나 유물을 소장하는 방식으로 입체화한다. 그리하여 몸의 경계에 있는 것이나 쓰레기에서 구제된 물건들은 생명과 비생명, 우아함과 비속함의 경계에 있게 된다. 비속함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결과적으로 신체의 기념비가 되고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기억의 증거가 되어 삶과 노동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박종욱은 어린 시절부터 수집해 온 것들인 곤충박제 등을 인체 회화와 함께 전시하여 왔다. 그것은 소우주를 뜻하는 수집의 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는데 이번 전시에서 그는 인체 회화와 함께 석고로 확장한 작은 동물 형태 조각을 전시하고 있다. 매우 늠름하고 치명적인 무기를 지닌 전사와도 같아 보이는 사자상은 연약한 나를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 대견함을 관객은 함께 경험하게 된다. 더불어 작가는 인간의 순간적인 움직임을 포착한 회화와 함께 이렇게 제작한 작은 존재들의 부분을 전시한다. 시각적으로 대비되고 고정시킴으로써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 설정의 범위, 그것들의 충돌을 가시화하며 개인의 감정이 결정하는 감각들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가지고 바라보게 한다.
수용과 관용의 법칙, 접속
접속이란 용어는 일상에서나 컴퓨터와 네트워크, 시스템 등의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서로 연결하거나 접근하는 상태를 뜻한다. 접속은 다시 두 가지 방식으로 구별될 수 있는데 장치와 장치, 프로그램과 서버 간에 통신을 위해 물리적 또는 논리적인 길(채널)이 만들어진 상태인 커넥션, 시스템이나 데이터베이스 등의 자원에 접근하여 정보를 읽거나 쓸 수 있는 권한이나 행위를 이르는 액세스로 구분된다. 즉 접속이란 서로 연결, 연결하여 관계를 맺거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프로토콜을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 소통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보다 안전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 세상을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유추, 생명성에 대한 성찰 등을 14명의 작가들을 통해 살피고자 한다.
지심세연의 회화는 검은 하늘에 섬광을 일으키며 날아올라 터져 확산하는 불꽃놀이나 미칠 듯한 속도로 다가와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와 같이 폭발하고 명멸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에너지 가득한 움직임은 하나에서 수만 가지 점으로 흩어져 형태는 사라지지만 그 에너지는 변함없이 다시 불꽃을 만들고, 파도를 움직인다. 에너지를 화면에 쏟기 위해 작가는 신체성을 극대화한다. 작가의 손과 화포가 만나는 그 찰나의 것들은 신체 외부와 내부,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지점이다.
박성훈의 작업은 뜨거운 유리에 숨을 불어넣는 블로잉(Blowing) 기법과 고체 상태를 다듬어 형태를 만드는 콜드워킹(Coldworking) 기법을 함께 사용하여 부드러운 숨과 날카로운 도구의 교차를 작품 안에 담는다. 그것은 텅 비어서 우주 만물의 창생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잉태한 씨앗이 되기도 한다. 생명이 없는 재료라고 일컬어지는 유리로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 인간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무생물의 재료에 숨을 불어넣어 완성된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신화를 상기시킨다. 보기에 차갑고 연약하다고 하여 그것의 에너지도 그러한 것은 아니다. 타자에게 인간도 그렇게 보이는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박혜원은 부드러운 재료를 사용한다. 그 부드러움이란 일상에서 사용하는 여성적 재료라고 하는 실, 비단과 같은 것들이다. 너무나 예민하여 자칫 잘못 엉키거나 올이 쏠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맘을 전달하고 관계를 상징하는 데 있어 매우 적절한 소재인 동시에 또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체의 위상을 갖는다. 시간, 공간, 감각, 삶을 은유하는 매체의 특성상 그가 보여주는 집의 구조는 그것을 담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 되고 인간의 역사가 된다. 오래된 삶에 대한 자구책, 자연 속에 인공이 가미되어 온전함을 취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의 노동집약형 작업에서 만난다.
최혜숙의 여인상은 언뜻 전통의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일 터이지만 현대인의 욕망을 아찔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허를 찔릴 준비를 하여야 한다. 붓끝으로 그려낸 여인의 아름다움은 작가의 붓끝에서 묘사의 단계를 거치지만 현대의 물질적 풍요와 욕망의 상징이 덧대어져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투명성을 담보로 하는 유리라는 재료는 ‘반짝이는’ 것들에 대한 패티시적인 욕망을, 오래된 명화의 인물이 지닌 지물을 통해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응하는 구조로서 연면하는 것에 대해 통찰하게 한다.
회화란 무엇으로 구성될까? 김서울의 작품은 그러한 질문을 가져온다. 캔버스 이외에 물질로서 캔버스 틀, 위에 발리는 물감과 붓, 여러 가지 오브제의 가능성 등을 ‘열어두고’ 작품을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그림이 되어가는 과정과 시간 그리고 물질이 관여하는데 이것들의 사용이 오래된 관습에 의존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미술사 안에서 작가의 창안이라는 그림이 실은 관습에 의해 색을 사용하고 기법 또한 그러한 법칙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의 생경한 색채는 그 틈을 비집고 만들어낸 또 다른 붓질과 작가의 움직임의 결과이다. 평평하게 올려진 물감 앞에서 모니터를 통한 보는 방식의 변화를 알게 된다.
김아라는 전통건축의 방식에 주목하여 그 방식으로 작품을 구조화한다. 면과 면이 만나거나 각을 이루는 곳은 동서양 모두 과거에는 모두 결구(結構)하였다. 즉 상대에 끼워 맞추어 단단히 고정하는 건축 방식을 그는 작품의 구조이자 표현으로 사용한다. 그것은 전통 창호를 만드는 방식이기도 해서 작품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결구들은 건축의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시선과 작품의 안으로 향하는 시선을 동일하게 만든다. 감각적 미를 동반한 목가구 구조의 도입은 전통과 현대, 물질과 형상, 공간과 시간 같은 것들의 연결을 사유하게 하고 모든 것의 접속의 순간이 그 경계를 허무는 것임을 보여준다.
민정See(김민정)의 화면은 파편화된 도시의 주변 풍경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변이란 발밑에 차오르는 여름날 길가의 덩굴식물들, 자투리땅에 길게 드리워진 건물의 그림자,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 아파트 거실에 그림자로 드리워진 쪼란히 놓인 화분과 같은 것들이다. 도시 안의 큰크리트 속에서 발견되는 식물의 싱그러운 또는 그것을 애정하는 마음은 자연을 향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를 드러낸다. 이들은 묘하게 단편적인 면들이 중첩된 속에서 형태를 갖는데 이는 작가가 판화라는 매체를 통해 보아온 세계의 재현이 관여된 탓일 것이다. 외형은 내면의 반영이라는 명제 아래 자연의 모습을 도시에 각인한다.
김형주의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시리즈는 눈앞의 잔디마당을 가시화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침대 광고문구를 작품의 명제로 삼은 것은 개인의 안락함마저 세상의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이윤과 연관지어 있음을 드러낸다. 작품의 주인공은 잔디가 아니라 사실 잔디마당에 자라는 잡초라는 반전의 상황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자연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잡초는 제초제를 먹어 누렇게 변해 있다. 그 가치의 효용성은 순전히 타의적 평가이자 자본주의의 결과이다. 삼각형으로 잘려진 잔디밭도 사실 판매되는 자연의 익숙한 모습에 불과하다. 분절된 형태는 ‘거대한 손’의 존재를 가시화한다.
정직성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서 소재를 취하여 왔다. “저 많은 집 중에 나의 집이 없구나!” 하면서 바라본 도시의 빽빽한 빌라촌은 마치 테트리스 게임에서처럼 단단하고 조형적으로 좋아 보였기에 그렸다고 한다. 바람에 눕는 대나무로 보이는 식물들도 잠시 머문 바닷가 집 앞의 조릿대였고 기계 연작은 남편의 자동차와 연관된 작업장에서 나온 풍경이었다. 화면 속 그어진 붓질이나 색채들은 추상적이지만 출발점은 생활 속 사물과 자연에 있었다. 일상과 자연은 고난이나 고통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존재이므로 정직성의 작품은 어떤 상황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삶의 태도에 대한 지향 결과라 할 것이다.
박소현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름, 표면의 꿈틀대는 가는 뿌리 같은 것들은 피부-노화되어 가는 그리고 머리카락의 측면들이다. 세밀한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서 확대하여 보는 것은 부분을 절개하여 보는 것과 같다. 단면을 보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은 편견에 사로잡힌 시각을 은유한다. 삶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며 갖는 감정들은 사실 그 파편화하고 줌인한 극히 일부의 것들에 의거한 경우가 많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인지한 것이 모두 옳은 것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한다. 사물을 분해하여 확대하는 방식은 그의 판을 만들고 이를 분해하여온 작업방식에서 시작한 것이다.
서예지가 비단 위에 그려낸 사물은 곰인형, 토끼인형, 꽃병, 시계, 고이 접은 쪽지 등과 같은 흔히 책상 위에 놓이는 일상의 사물들이다. 하지만 토끼 옆에 시계가, 발레 옷을 입은 곰인형 옆에 발레 슈즈가 놓여 있어서 이들은 인형을 넘어선 인간 정체성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하루하루 같은 것 같지만 늘 다른 사건이나 일들로 구성된 것처럼 변화무쌍한 것은 그 사건에 대한 태도이지 사건 자체가 아님을 그의 담담한 화면 앞에서 인지한다. “우리는 하루의 반 이상을 타인과 함께 시간을 가지는데,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따라 변화하며 생활한다.”라는 작가의 말은 관계성, 그 안에서 변화하지 않는 고유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박예림은 한지에 모래를 붙이고 위에 먹을 칠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모래그림에서처럼 그것은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하는 심상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동양화가로서 먹은 번짐을 통해 모래를 넘어선 흔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호분을 이용함으로써 번짐을 극대화한 것은 미확정적 공간의 구현과 예기치 않은 우연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이렇듯 먹의 속성을 이용하여 추상적 형태 안에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을 소환한다. 작품이란 작가의 내부와 화포 혹은 표출된 작품의 표면인 외부가 만나는 지점에서 성립하는데, 그것은 관람자의 감각에 의해 인지된다. 경험의 공유란 무의식 저편에서도 오는 것이다.
박경묵의 농묵은 쌓아올리고 쌓아올리는 신체의 반복성에 의한 결정체이다. 행위의 에너지에 의해 구축된 형태는 호수 위에 굳건히 드러난 바위산의 단단함을 상상하게 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을 먹으로 구현하는 동양화의 정신은 점점 옅어져 가는 담묵(淡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잔잔한 수면 위 그림자처럼 보이는 옅은 먹은 농묵(濃墨)으로 보이는 부분의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관람자는 백지 위에 먹이 오갔을 뿐인 화면에서 섬을 보고 바람을 느낀다. 공감각을 동원하여 관람자의 내부에서 끌어내 오는 감각이 작동한 탓이다. 고유함에서 온 붓질만이 만들어내는 구축감을 자연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김지민의 먹은 캔버스 위에서 한없은 깊이를 생성한다. 그 위에 별이 떠 있는 듯 반짝이는 것은 금분으로 빛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하고 있다. 서양의 매체인 캔버스 위에 동양의 재료인 먹과 금분이나 금박을 사용하여 중첩된 문명과 시간성을 담보하고 있다. 작품명은 추상회화의 일련번호를 매기는 방식이어서 철저히 추상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지만 기시감이 있는 것은 추상화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서구의 방식으로 보이게 하는 동양의 재료로 나타낸 화면을 통해 서구에 의해 점령된 시각적 해석의 방식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동양과 서양이, 사상과 감정 등 모든 것이 융합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현재에 미래는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과거를 통해 조망될 수밖에 없는 미래는 과거가 현재와 만나는 방식처럼 현재와 미래가 만날 것임을 예견하게 한다. 그 항로에서 우리는 새로운 도구들의 시대에 새로이 만나는 것들을 또한 상상하게 된다. 가장 인간적이며 숨을 고르고, 전통에서 발원하여 현재를 호흡하는 것들조차 탄생한 순간 과거가 됨으로써 우리는 미래를 향한 노정이 있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모두 과거가 되어버리는 사건과 작품들은 이미 미래라는 망망대해를 향한 매체들인 것이다.
계속되는 삶의 기념비, 조우
바다로 나가는 것은 모험이자 개척의 행로였고 결과적으로 다른 문명과 만남,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잘 회복하여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서사는 유한한 생명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모든 것의 본질적 우위의 존재로 믿게 한다.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모험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고 지금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에게 나타난 새로운 단어는 소외였다. 끝없이 추락하게 하는 소외로부터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대안은 자연으로의 복귀였다. 모더니즘 건축의 공간을 지나 모란미술관 뒤편의 한옥 영역에 들어서면 자연 혹은 전통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한옥 안에 들어선 작품들을 ‘조우’라는 범주에 넣었다. 자연과 인간, 외부와 내부, 미래와 현재라는 전시의 시작부터 줄곧 찾아나선 것들의 종착점이자, 자연 안에서 작품은 어떻게 보여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장소이다.
류은미의 블루(Blue) 색상은 모더니즘 회화에서 보여주는 절대적인 상태의 지향인 블루와는 다른 상징이자 깊이가 있는 색의 이름이다. 그것은 블루스크린의 준말이자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협조하던 대상이 완벽히 거부를 표현하는 색채이다. 현대인에게 블루스크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사고이자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대화, 소통의 불가라는 상황을 작가는 블루스크린의 색채와 컴퓨터 화면에 뜨는 코딩을 닮은 실패한 기호들을 나열하여 그 좌절을 드러내고 음성 그래픽을 그림으로 고정시킨다. 대화란 언어의 의미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이 해체되었을 때 오히려 더 직관적으로 소통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전망하게 한다.
노해율은 “마음이 흐르는 곳으로 방향키를 놓고 추측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면 움직이는 형태가 떠오른다. 나에게는 형태나 컬러보다 움직임이 더 비중 있게 다가오고, 그 움직임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이 나의 작품의 근간이 된다.”라고 한다. 움직임이란 생명의 근원, 에너지의 다른 표현법일 것이다. 기계를 기계답게 표현하는 그의 작품은 AI시대에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기준을 제안하는 듯하다. 실재적 움직임, 비 온 후, 기계적인, 로딩 같은 명제는 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움직임의 근원을 드러내는 언어이다. 특히나 지루한 ‘로딩’을 명쾌히 성공하지 못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자동하는 생성의 에너지로 바라보는 시각은 AI시대에 유요한 개념일 지도 모른다.
허현숙은 자신이 살던 다정한 마을이 깨져가는 과정을 산수화처럼 보이는 한가한 풍경 안에 담았다. 남의 일이어서 상관없다는 자조적인 표현법인 ‘강 건너 불구경’을 뒤튼 ‘불 건너 강구경’은 마을 안에 돌보지 않는 것들을 드론을 띄운 것처럼 부감법으로 재현하고 있다. 연필과 먹으로 세밀히 그려낸 ‘성실한’ 그림은 삶을 그대로 기록하는 듯하지만, 사실 은유로 가득한 것이다. 넘쳐나는 현수막은 축하의 깃발이 나부끼는 축제장처럼 보이게 하지만 그 빈 언어들 속에서 씁쓸함을 느끼는 동시에 묘한 위로도 느끼는 삶의 방식을 담아낸다. 축하의 목적어가 없는 현수막의 반복성과 중첩성은 하루하루가 쌓이는 방식을 닮아있다.
신승민의 도자는 경험을 가시화한 것이다. 장독에 책이나 일기장과 사물을 결합한 형태는 구체적인 이야기 구조를 지닌다. 월남전 참전의 기억을 가진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흥미진진했던 시간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보물찾기는 유년의 기억이지만 과거가 현재로 다가와 있고, 현재와 조우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 의미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라믹이라는 전통의 재료를 유쾌하게 다루는 도자조형은 추상의 개념을 구상적 형태로 드러내는 데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 워낙 오래된 재료라는 공신력 때문일 것이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사실 아주 오래된 것이고 그것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 TV 역사상 최초로 흑인과 백인이 키스한 장면이 방영된 것은 1968년 11월 22일의 <스타 트렉(Star Trek)>에서였다. 인종 간 결혼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던 사회에 던진 파장은 짐작할 만하지만, 사랑의 징표로 키스가 가능했던 것은 이들이 우주선 엔터프라이즈호의 승선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상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기에 용인될 수 있는 사건은 푸코가 제시한 배 안의 유토피아 개념과 같다.
푸코(Michel Foucault)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이상향인 유토피아와 달리, 배는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면서도 모든 사회적 공간의 바깥에 위치하며 타자가 공존하는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라고 하였다. 문명 속에서 배는 바다라는 무한한 공간 속을 떠다니는 유토피아 그 자체라는 것이다. 머나먼 우주로 향해 날아갔던 엔터프라이즈호의 승선원들은 다른 종족을 만나 갈등을 겪지만 결코 전쟁을 하지는 않았으며 결국은 이해하고, 관계 맺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인간 사이, 문화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과 태도의 차이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자 삶의 흥미로운 다양성의 일부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라고 한 원작자 진 로든베리의 신념 때문이기도 했고, 항해에 나선 배의 상징성 때문이기도 했다.
배를 띄워 닿기 원하는 이상적인 장소는 과거에는 황금이 굴러다니는 대륙이었던 반면, 1960년대에 미래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차이를 존중하는 세계였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의 인류는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 부가 아니라 생존이 보장받고 존중받는 것임을 58년 전 우주를 향해 끝없이 날아오른 전함의 선원들 덕에 알게 되었다. 21세기 컴퓨터 화면 속으로 인류 전체가 항해에 나선 전대미문의 대항해 시대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항해인가를 잊지 말도록 나팔수가 되어준 작가들은 오딧세이(Odyssey)의 유랑이 아니라 탐험과 평화유지라는 소명을 지닌 엔터프라이즈호처럼 우리에게 길을 잃지 않는 좌표를 제시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직 그 좌표가 아직 결정되지 않아 더 멀리 더 깊이 도달할 수 있음이 다행인, 희망의 작가들이 우리 앞 깊고 깊은 항해 레이더망에 초록빛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