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감춘 화가의 자화상 — 뱅크시는 왜 원숭이가 되었을까

자화상이라고 하면 우리는 먼저 화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렘브란트도, 반 고흐도 자신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화폭에 남겼지요. 그런데 정체를 공개하지 않는 거리의 예술가 뱅크시(Banksy)가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떨까요?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가장 큰 미스터리가 사라져버릴 테니까요. 뱅크시의 《Self Portrait》은 바로 이 역설에서 시작하는 듯한 작품입니다.
화면을 보면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하지만 얼굴은 사람이 아니라 침팬지의 얼굴로 가려져 있습니다. 손에는 거리 예술가를 상징하듯 스프레이 캔이 들려 있습니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알고 바라보면 더욱 재미있어집니다. 이것이 정말 작가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는 자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장 중요한 얼굴만은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셈이니까요. 2007년 당시 영국 언론도 이 작품을 ‘침팬지 얼굴을 한 인물’의 자화상으로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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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에게 원숭이는 낯선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 원숭이와 침팬지는 인간 사회를 비추는 등장인물처럼 반복됩니다. 다만 이 《자화상》 속 원숭이가 정확히 무엇을 상징한다고 작가가 직접 설명했다는 확실한 자료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작품 앞에서는 정답을 정하기보다 질문을 던져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 그는 자신의 얼굴 대신 원숭이 얼굴을 선택했을까요? 유명 예술가의 ‘얼굴’에 집착하는 미술계와 대중을 향한 장난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까지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일까요?
작품의 이력도 흥미롭습니다. 이 작품은 뱅크시가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기 전인 2000년 브리스틀의 세번셰드(Severnshed)에서 열린 전시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2007년 4월 런던 본햄스 경매에 나왔는데, 당시 예상가는 약 4만 파운드였습니다. 그런데 낙찰가는 무려 19만8천 파운드. 예상가의 거의 다섯 배였으며 당시 뱅크시 작품의 경매 최고가 기록을 새로 썼습니다. 구매자는 미국인이었습니다.
여기서 뱅크시라는 예술가가 가진 독특한 아이러니가 드러납니다. 그는 거리의 벽을 작업 공간으로 삼고 권력과 소비사회, 제도와 관습을 풍자해왔지만, 그의 작품은 동시에 세계 미술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예술가의 자화상’입니다. 작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작품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고, 그 궁금증이 작품의 명성과 시장 가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묘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화상》 앞에서는 얼굴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오히려 얼굴이 없다는 사실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흔히 예술가를 이해하려면 그의 삶과 얼굴부터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뱅크시는 그 기대를 슬쩍 비켜갑니다. “내가 누구인지보다 내가 무엇을 보여주는지를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어쩌면 이 작품에서 가장 뱅크시다운 부분은 침팬지 얼굴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화상’이라는 가장 개인적인 장르를 선택하고도 끝내 자신의 정체는 내놓지 않았다는 것. 보여주면서 숨고, 유명해질수록 더 익명으로 남는 것. 그 모순이야말로 우리가 지금도 뱅크시라는 이름을 궁금해하며 그의 작품 앞에 서게 만드는 힘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