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 인간과 기계의 시선이 만나는 《데이터 사피엔스》
인공지능에게 숲을 보여주면 무엇이 보일까요? 나무와 잎사귀, 빛과 그림자를 구별하고 수많은 이미지와 비교해 이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숲속의 바람을 피부로 느끼거나, 오래전 걸었던 산길을 떠올리는 일은 어떨까요? 인간과 인공지능은 같은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전남미술관의 《데이터 사피엔스(Data Sapiens)》는 바로 그 차이에서 출발합니다. **데이터로 세상을 이해하는 시대, 인간만이 지닌 감각과 지혜는 무엇일까요?**
전시 제목은 '지혜로운 인간'을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경험뿐 아니라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정보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합니다. 전남 AI 데이터센터 구축이라는 지역적 변화와 맞물려 기획된 이번 전시에는 백남준, 빌 비올라, 하룬 파로키, 박상화 등 국내외 11인(팀)의 작가가 참여해 14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AI를 활용한 최신 작품들만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인공지능 예술이 등장하기까지 기술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함께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cards:artist:1057,artist:3304]]
그 출발점에 있는 인물이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입니다. 첫 번째 섹션 '기술, 감각을 다시 쓰다'에서 만나는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1969/1972)는 일본의 기술자 아베 슈야와 협력해 개발한 장치입니다. 텔레비전이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영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보는 매체였던 시대, 백남준은 전자 신호를 직접 조작해 화면의 색채와 형태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탐구했습니다. 오늘날 누구나 디지털 도구로 이미지를 변형하는 일이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영상 자체를 예술가의 손으로 빚어낼 수 있다는 발상이 혁신적이었습니다. 이 작품 앞에서는 AI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예술가들이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image:https://pub-f6e995b5adb6448c86478bc9e34840da.r2.dev/admin-library/9eaa229b-72c7-480b-af86-53e30e814d9d.jpg|《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1969/1972)]]
같은 공간에서 하룬 파로키의 《인터페이스》(1995)와 빌 비올라의 《관찰》(2002)을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파로키가 영상과 편집 장치를 통해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해석되는 과정을 돌아보게 한다면, 인간의 내면과 감각을 탐구해 온 비올라의 영상은 기술이 인간 경험을 표현하는 또 다른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 작품을 나란히 살펴보면 중요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기계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인간이 그 이미지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같은 일일까요?**
[[image:https://pub-f6e995b5adb6448c86478bc9e34840da.r2.dev/admin-library/b788ff93-5804-4a5d-b8e3-4b66a4d5cd26.jpg|《분석 풍경》(2025)]]
두 번째 섹션 '알고리즘이 그린 풍경'에서는 그 질문이 자연으로 향합니다. 신승백·김용훈의 《분석 풍경》(2025)과 박상화의 《포스트네이처-가이아의 섬》(2026)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박상화의 작품은 '자연 이후의 자연'이라는 흥미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은 인간의 눈과 몸으로 경험한 세계입니다. 그런데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통해 구성된 자연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 작품들을 감상할 때는 화면이 얼마나 사실적인지보다, **기계가 해석하고 만들어낸 풍경이 우리가 기억하는 자연과 어떻게 다른지**에 주목해보세요. 자연을 재현하는 예술에서 자연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예술로 시선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image:https://img2.yna.co.kr/photo/cms/2026/07/14/37/PCM20260714000237990_P4.jpg|《포스트네이처-가이아의 섬》(2026)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기사)]]
세 번째 섹션 '데이터와 몸 사이'에서는 관객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베른트 린터만과 피터 바이벨의 《유 아 코드》(2017), 배준형의 《버비오타》(2026), 신승엽의 《객관적 시뮬레이션에 물리적으로 렌더링된 선충 지향 생명체》(2026)가 소개됩니다. 이곳의 핵심은 데이터를 눈으로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체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데이터를 차갑고 추상적인 숫자로 생각하지만, 그 데이터가 인간의 움직임과 지각에 연결되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참여형 작품 앞에서는 결과를 서둘러 확인하기보다 자신의 행동과 작품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image:https://pub-f6e995b5adb6448c86478bc9e34840da.r2.dev/admin-library/411a8703-1260-4a60-a3ff-ad17443f9fe8.jpg|《유 아 코드》(2017)]]
[[image:https://pub-f6e995b5adb6448c86478bc9e34840da.r2.dev/admin-library/ab4670f4-27f6-4f04-9c27-53c8c48af2a3.jpg|《객관적 시뮬레이션에 물리적으로 렌더링된 선충 지향 생명체》(2026)]]
마지막 섹션 '인간과 AI의 얽힘'에서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한층 복잡해집니다. 대만 작가그룹 2ENTER의 《UUID: 사용자의 고유한 은하계 주사위》(2026), 신도원의 《아이로봇》(2026), 신교명의 《신교명의 초상+기계종》(2023~2026)이 등장합니다. 특히 신교명의 작품 제목에 함께 놓인 '초상'과 '기계종'이라는 단어는 인상적입니다. 초상이 한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예술이라면, 기계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의 정체성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AI가 인간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인간은 다시 AI가 만들어낸 결과에 영향을 받는 관계 속에서, 창작자와 도구를 명확히 구분하는 일도 점점 어려워집니다.
[[image:https://pub-f6e995b5adb6448c86478bc9e34840da.r2.dev/admin-library/d899a58a-fed5-4534-b4dd-add2536b53c7.jpg|《UUID: 사용자의 고유한 은하계 주사위》(2026)]]
이 전시가 전남에서 열린다는 사실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자연환경과 생활 속 경험을 통해 지혜를 축적해 온 지역에 데이터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환경이 더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삶의 지혜와 첨단 기술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데이터 사피엔스》는 AI가 인간보다 뛰어난지, 혹은 인간을 대체할 것인지에 대한 단순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백남준의 전자 영상 실험에서 오늘날의 AI 기반 작품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통해 우리가 기술과 맺어온 관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전시장을 나설 때쯤에는 처음의 질문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결국 이 전시의 중심에는 기계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