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컬즈

버티컬즈

아트선재센터는 2026년 10월 27일부터 12월 27일까지 더그라운드와 야외 정원 공간에서 《버티컬즈》를 개최한다. 《버티컬즈》는 조각과 건축의 핵심적인 조형 원리로 작동해 온 ‘수직성’에 주목하고, 이 개념이 역사적으로 남성성을 은유해 왔다는 점에서 의문을 제기하며 시작한다. 서 있다, 꼿꼿하다, 높다, 세우다,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수직의 방향성을 담고 있다. 조각의 경우 직립한 신체나 기념비를 떠올릴 수 있으며, 건축의 경우 기둥이라는 기본 요소에서 출발하여 휴먼 스케일을 넘어서는 구조물을 연상할 수 있다. 이는 상승, 권위, 힘을 표상하는 조형 언어로 기능해 왔다. 수직을 향한 동력의 이면을 살펴보면, 인간 신체와 젠더를 둘러싸고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권력과 사회적 규범이 자리한다. 그렇다면 남성적인 것으로 수렴하지 않는 수직은 어떠한 모습일 수 있을까? 전시는 건축 공간에 반응하는 조각과 설치 작업을 통해 또 다른 수직성을 상상한다. 수직의 축을 기울이고, 뒤집고, 매달고, 해체할 때, 우리는 하나의 ‘수직(vertical)’에서 복수의 ‘수직들(verticals)’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맑음, 「수직 공간 」 ‘현대’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도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패전 직후, 베를린이 시도한 것은 최초의 고층 건물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 초의 프리드리히슈트라세(Friedrichstrasse) 삼각 부지 현상설계 공모는 그러한 이유에서 출발하였다. 모든 것이 사그라진 지면 위로, 휴먼 스케일을 뛰어넘는 ‘높이’를 수직 방향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수직은 시선을 끝없이 하늘로 향하게 하면서 희망의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공모전에 출품된 한 낙선작에서 출발해 본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한 건축가는 고층 건물 전체가 유리로 투명하게 보이는 설계안을 제안하였다. 장식이 전혀 없는 철골 구조와 유리였다. 당연하게도 당시로서는 미니멀하고 급진적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낙선했다. 그는 30여 년이 지난 이후 판스워스 주택을 설계하면서, 투명한 유리 공간이라는 아이디어를 실현한다. 지면에서 살짝 뜬 공간은 사방이 통창으로 되어 있었다. “Less is more(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문구처럼, 그곳은 유리로 만든 조각처럼 아름다웠고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여성이었다는 점은 그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그는 끊임없이 노출되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설계된, 그 투명한 고층 건물은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을까. 사실, 공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지하지 못하는 은연중에 사회 시스템을 체화하게 만든다. 더 높은 수직성은 권력과 자본이 있어야 가능하고, 젠더적인 관점에서는 대개 오랫동안 질서가 된 남성성을 기반으로 삼고있다. 내부 공간을 살펴보자면 기능상 성별이 구분된 공간도 있지만, 사용자에 따라서 젠더성이 강화된 공간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중성적인 공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더 수직적인 공간일수록 젠더, 권력, 자본이 여러 층으로 집적되고, 내부는 더 은폐되어 중성적인 공간으로 보이게 된다. 이는 많은 이들이 스스로 발 딛고 있는 공간을 감각하면서도 흔히 간과하는 지점이다. 분명 어떠한 조각들은 기념비성을 가지고 공공 공간에서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세워진다. 하지만 어떠한 조각은 가려진 것을 드러내고, 힘의 균형과 중심을 잡고, 서로 기대어 쌓이는 모습으로 세워진다. 이러한 태도는 조각 매체에서 새로운 장면이 아니다. 이미, 여성과 퀴어를 경유하는 조각은 또 다른 수직성을 탐구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를 역사 속에서 표현해왔다. 단지 우리가 그 의지를 늦게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단순히 남성성을 은유하는 수직성으로 귀결되지 않는 것이다. 조각들의 수직성에 기대어 보기를 제안해본다. 어쩌면, 조각의 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수직성, 정확하게는 눈‘높이’를 기꺼이 잃어버리는 것일지 모른다. 덜 수직적일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