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소장품전《블랑 블랙 파노라마》

2026 소장품전《블랑 블랙 파노라마》

수원시립미술관 소장품전
«
블랑 블랙 파노라마
»
는 흑과 백이라는 두 축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
프랑스어
‘
블랑
(blanc,
흰
)’
과 영어
‘
블랙
(black,
검은
)’
의
어원을 살펴보면
,
언어학적으로
두 단어 모두 빛이나 불
,
연소와 관련된 어근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
이는
‘
빛나다(to shine)
’
또는
‘
타다(to burn)
’
의 의미를 지닌 인도유럽조어
*b
ʰ
leg-
가 그 배경으로 제시된다는 해석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이는 백과 흑
,
밝음과 어둠이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기원에서 파생되는 개념임을 암시한다
.
불이 되어 하얗게 빛나는 상태를 지나
,
다 타버린 뒤 검게 그을린 재로 남게 되는 일련의 과정
.
빛남과 그을림
,
드러남과 감춰짐은 대립이 아닌 연쇄적인 작용이며
,
서로를 전제하여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다
.
이는 대립을 넘어 상호 의존 속에서 드러나는 상태
,
곧 불이
(
不二
), ‘
둘이 아님
’
의 사유에 닿아 있으며
,
명확한 경계나 단정적인 판단보다 연결의 감각을 요청하는 태도를 지닌다
.
전시는 이러한 어원적 배경을 실마리로 삼아 세계를 분절적으로 이해해 온 시선을 거두고
,
예술이 지닌 성찰적 태도를 새롭게 비추어본다
. ‘
백
’
은 불타지 않음이 아니라 아직 그을리지 않은 상태이며
, ‘
흑
’
은 소멸이 아니라 빛이 지나간 흔적이다
.
이처럼 둘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그 성질을 드러낸다
.
전시에서 소개되는
20
여 점의 소장품은 이러한 태도를 작품의 형식과 방법의 차원에서 구현하고 있다
.
작가는 대상의
‘
무엇
’
을 재현하느냐보다 대상과 맺는 관계를
‘
어떻게
’
표현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며
,
반복과 중첩
,
필사와 축적
,
긋기와 비우기 같은 수행적 방식을 표면 위에 남긴다
.
이러한 방식은 흑과 백
,
명과 암
,
드러냄과 남김 등 상반되어 보이는 요소들이 상호 배제되지 않고 서로를 경유하며 동시에 작동하게 만든다
.
이제 어둠과 밝음은 서로에게 닿는 자리에서
‘
채움
’
과
‘
여백
’
의 성질로 교차하며 관계를 이룬다
.
이때
‘
파노라마
’
란 하나의 시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
서로 다른 작품들이 나란히 놓이며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장면
,
그리고 그 사이를 이동하며 생겨나는 미묘한 차이와 공백의 총합을 가리킨다
.
흑과 백
,
밝음과 어둠
,
채움과 비움이 끊임없이 전환되는 장면 속
,
전시는 단정 짓기보단 머뭇거림을
,
결론 대신 사유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을 제안한다
.
이제 작품은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
관람자가 각자의 속도로 머물며 관계 속에 존재하는 서로를 살필 수 있는 조건으로 제시된다
.
작품 사이를 거닐며 고정된 구분을 넘어 자신만의 감각과 사유를 새롭게 마주하길 바란다
.